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던 적이 있나요?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고,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짓누르는 그런 순간 말이에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런 영화였어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2023년 작품으로, 제80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며 화제가 되었죠. 이 영화는 단순한 드라마를 넘어, 우리에게 악이란 무엇인지, 인간과 자연은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작은 마을에 찾아온 소동
영화는 도쿄 근교의 작은 산골 마을 미즈비키에서 시작됩니다. 이곳에 사는 타쿠미는 딸 하나와 단둘이 살아가며, 마을 사람들을 위해 나무를 베고 물을 길어주는 일을 하죠. 마을은 맑은 시냇물과 야생 와사비가 자라는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평화로운 마을에 글램핑장 건설 계획이 발표되면서 이야기가 꼬이기 시작합니다. 도시에서 온 연예기획사 직원들이 주민 설명회를 열지만, 마을 사람들은 환경 파괴를 우려하며 강하게 반발하죠.
특히 주민들은 글램핑장의 오수 처리가 지하수를 오염시킬까 봐 걱정합니다. 영화 속에서 마을 회장이 던진 말,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요. 상류의 행동이 하류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 단순한 진리는, 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로 다가왔어요. 이 장면은 마치 우리 사회에서도 자주 보이는 개발과 보존의 갈등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죠.
누가 악인일까
영화를 보면서 계속 떠오른 질문은 바로 악이란 무엇인가였어요. 글램핑장을 추진하는 연예기획사 직원들,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처음엔 마을 사람들의 우려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점차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해요. 이들은 악당처럼 보이지 않아요. 그냥 회사의 지시를 따르는 평범한 직원일 뿐이죠. 반면, 타쿠미와 마을 사람들은 자연을 지키려 하지만, 그들의 저항도 때로는 감정적으로 흐르곤 해요.
이 영화는 누가 옳고 그른지를 명확히 나누지 않아요. 대신, 모두가 각자의 입장과 이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걸 보여주죠. 하마구치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만들며 환경 문제가 단순히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했어요. 이 점이 영화가 주는 묵직한 울림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숲이 말하는 시선
영화의 첫 장면은 정말이지 잊을 수 없어요. 카메라가 숲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움직이는 트래킹 숏으로 시작하죠. 이 장면은 마치 숲이 우리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어요. 누군가의 시선인지, 아니면 자연 그 자체의 시선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낯선 시각은 영화를 보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게 했어요. 하마구치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관객이 익숙한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길 바랐다고 하더라고요.
영화 곳곳에서 이런 카메라 워크가 돋보였어요. 예를 들어, 타쿠미가 차를 몰고 갈 때 카메라는 차 뒤쪽을 비추며 마치 누군가가 뒤를 쫓는 듯한 느낌을 주죠. 이런 연출은 평범한 장면에도 미묘한 불안감을 불어넣었어요. 개인적으로 이건 감독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 같았어요. 우리는 정말 이 이야기를 누구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걸까?
음악과 침묵의 조화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이시바시 에이코의 음악이에요. 원래 이 작품은 이시바시의 공연용 영상으로 기획되었다가 극영화로 발전했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음악이 영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느낌이 강했어요. 그런데 이 음악은 갑작스럽게 끊기곤 해요. 잔잔한 멜로디가 흐르다 갑자기 정적이 찾아오면, 숲속의 바람 소리나 새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리죠. 이 침묵은 마치 자연이 말을 걸어오는 듯한 순간이었어요.
특히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음악과 영상의 리듬이 점점 더 불규칙해지면서, 관객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어요. 이건 마치 우리가 자연과 마주할 때 느끼는 경외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담아내려는 시도 같았어요. 영화관에서 이 소리를 듣는 건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집에서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몰입감이 있더라고요.
끝나지 않는 질문
영화의 마지막은 쉽게 잊히지 않아요. 스포일러를 피하려고 자세히 말하진 않겠지만, 예상치 못한 전개로 끝나면서 수많은 질문을 남겼어요. 타쿠미와 그의 딸 하나, 그리고 마을을 찾은 외지인들의 이야기가 얽히면서, 인간과 자연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죠. 영화가 끝난 후에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그렇게 되었을까 계속 곱씹게 되더라고요.
하마구치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했어요.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니 악의 정의뿐 아니라, 우리가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이건 단순한 환경 영화가 아니에요. 우리의 일상,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이 미치는 파장에 대한 이야기죠.
왜 이 영화를 봐야 할까
악은 존재하지 않다는 2024년 3월 27일 국내 개봉 후, 독립영화로는 드물게 4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입소문을 탔어요. 씨네21 같은 매체에서는 이 작품을 하마구치 감독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평가하기도 했죠. 이 영화를 추천하는 이유는 단순해요.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이기 때문이에요. 화려한 액션이나 감동적인 로맨스를 기대한다면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조용히 마음을 파고드는 이야기에 끌린다면 분명 만족할 거예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어요. 큰 화면에서 보는 숲의 풍경과 소리가 주는 몰입감은 정말 대단했거든요. 만약 기회가 있다면, 꼭 극장에서 경험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영화를 본 후에는 친구나 가족과 함께 그 여운을 나눠보세요. 각자 다른 해석을 들어보는 것도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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